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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ormed Worship] 하나님 닮아가기: 진정한 예배의 조건으로서 정의 행하기



니콜라스 볼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예일대학교 노아 포터Noah Porter 철학 신학 명예 교수이다.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즈에 있는 Church of the Servant에 출석한다.



Reformed Worship 매거진 이번 호 주제인 예배와 정의가 다소 이색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마치 말과 소를 한데 묶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아직 다뤄지지 않은 주제를 찾기 위해 편집자들이 고심했을 것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사회 운동가들에게 이 주제를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예배와 정의를 함께 생각하지 않거나, 더 심하게는 함께 생각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저항이 곧 우리가 성경의 가장 깊은 주제 중 일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임을 알리고 싶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회중 밖에서 공의를 실천하기 않았기 때문에 회중 내에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신다는 구절(이사야 1:11-17, 58:3-7, 아모스 5:14-24, 미가 6:1-8) 중 적어도 몇 개는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아모스 5장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들만 떼어 놓고 보면 하나님이 예배 대신 사회 정의를 원하신다는 급진적인 해석이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읽으면 그러한 해석은 타당성이 없다. 대신 불의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수반된 사회 정의가 진정한 예배의 조건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어떤 예배에는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정해진 기도문을 사용하는 것이 예배의 진정성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한다. 기도란 자고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즉흥적으로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성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 진정성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가 특정 신학적 견해를 갖고 있지 않으면 예배의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열정” 없는 예배는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등등. 아마도 진정성의 조건에 대한 이러한 견해 가운데 일부는 성경에 암시되어 있긴 하지만, 명백하게 가르치는 부분은 없다.  


그러나 성경은 예배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정의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진정성이 결여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진정성이 결여된 예배란 곧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신다는 뜻이다. 


회중 안팎에서의 정의 

이 가르침은 놀랍다. 필자가 일관되게 언급했던 모든 견해는 예배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 연관이 있다. 여성이 설교를 하거나, 정해진 기도문을 사용하는 것은 회중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선지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회중 밖에서 행해지는 일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회중 밖에서 공의를 행하지 않으면 회중 안에서 하는 일로 하나님이 불쾌해 하신다. 


그러나 성경에는 회중 내에서 일어나는 예배의 진정성을 떨어뜨리는 일들에 대해 언급한 구절도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서신에서 주의 만찬을 축하하는 모임에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행동을 언급한다. 부유한 사람들은 먼저 도착해 음식을 먹고 포도주에 취해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일을 마치고 도착해 보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울은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라고 말한다. 또한 야고보서의 저자는 자신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암시하고 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야고보서 2:2-4)


저자는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라고 말하며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라고 묻는다. 정의와 불의에 관한 선지자의 선포가 암시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없다. 회중 밖에서 행하는 불의뿐 아니라 회중 안에서 행하는 불의 역시 예배의 진정성을 결여시킨다. 


잘못된 이해 

선지자들이 암묵적으로 비판하고 있던 예배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해 보자. 보상과 속죄의 예배, 즉 일상에서 저지른 불의에 대해 만회하고, 그로 인해 화가 난 하나님을 노래와 기도, 희생 제물을 드리며 달래려는 예배가 그것이다. 하나님은 불의를 싫어하신다. 그러나 예배 받는 것을 좋아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충분히 함으로써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 것을 만회하고, 이렇게 자신의 크레딧을 적자가 아닌 흑자로 유지하려고 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삶과 예배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만일 그렇다고 해도 대놓고 그러기 보다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대신 많은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것을 세속적인 삶을 뒤로하고 다른 공간, 즉 성스러운 공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시간 정도 보내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교회 건물이 이런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충분한 열정과 겸손으로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우리의 실패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예배에 불쾌감을 느끼게 할 수 있지만, 예배에서 우리는 세속적인 일상을 뒤로하고 나오기 때문에, 일상에서 한 일로 하나님이 불쾌해 하진 않는다. 우리가 매일 걱정하는 것을 뒤로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잠시라도 중심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가 일상의 생각이 침입하도록 허락한다면, 하나님은 불쾌해 하산다.   


그럼 어떻게 할까? 

선지자들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일상에서 저지르는 불의를 만회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예배를 드리러 갈 때 사업, 정치, 법률 등의 세속적인 공간을 떠나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세속적인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항상 그곳에 계신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아오는 사람은 자신의 일상을 회중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 일상을 뒤로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들어와 이제 그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뒤에 계신 것처럼 살아간다. 이제 그는 돌아서서,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자신의 일상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다. 그는 자신과 타인의 삶에서 좋은 것들을 발견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자신과 타인의 삶에서 발견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탄식하며,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행한 잘못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비길 데 없는 위엄을 찬양한다. 


불의를 저지르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그것을 내어 놓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정말 좋아하실 만한 일을 한 시간 정도 하면서 만회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예배는 만회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예배는 모임 밖에서 저지른 불의를 만회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모임 안에서 저지른 불의를 만회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예배는 자신의 삶, 즉 모임 밖에서의 삶과 모임 안에서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구원 

성경 기자들도 분명 정의와 부정의, 그리고 그것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 이제 노인 스가랴가 세례 요한이 된 아들 요한이 태어났을 때 성령의 감동을 받아 부른 노래로 넘어가 보겠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두 구절 모두 억압과 불의로부터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자신의 백성을 불의로부터 구원하고 구속하는 일을 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울부짖게 하는 모든 것, 눈물을 흘리게 하는 모든 것에서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두드러진 것은 불의로부터의 구원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구원에는 불의로부터의 구원이 포함된다. 성경에서 정의를 제거하면 더 이상 성경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여 함께 예배하는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시고 불의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이다. 


불의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스스로가 정의를 추구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 즉 불의의 결박을 풀고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부르심이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 기자가 실망한 배경이다. 앞서 필자가 지적한 구절을 제시하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차별하는 여러분의 행위가 정말 영광스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모습입니까?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그것은 정의의 징표이자 표본이 될 것이다. 우리의 예배가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라면,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우리 스스로 정의를 추구하도록 인도하고 힘을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가 진정한 예배라면 정의를 추구하며 주저하고 좌절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우리가 행한 것을 취하여 그리스도의 정의와 평화의 왕국이 임하는 데 사용하시기를 간구하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정의는 우리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우리는 새로운 희망과 인내를 가지고 일상의 거룩한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예배는 자신의 삶, 즉 회중 밖의 삶과 회중 안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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