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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팬데믹 상황에서의 지구촌과 크리스천의 세계관

강영안 | 美 칼빈신학대학원 철학신학 교수


1. 여러분 안녕하신지요?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전염병Pandemic으로 인해 안녕하지 못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COVID)-19’ 사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타격이란 말이 유럽 일각에서 나옵니다. 전염병으로 이토록 속수무책이 된 일은 100년 만에 처음이라고 전염병의 역사를 아는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WHO의 통계를 따르면 현재까지 40만 명 이상이 감염되었고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중국에서 시작하여 한국으로, 일본으로, 이란으로, 이탈리아로 번져 나가더니 이제는 유럽과 미국을 덮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우간다 선교사님으로부터 오늘 아침 들은 소식으로는 청정지역으로 여겨지는 그곳조차 9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국경은 봉쇄되고 여행은 금지되고 일상은 교란되고 있습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미시간 주만 해도 오늘부터는 스테이 홈 Stay Home을 주지사가 명령하였고, 저도 인터넷을 통해 화상 강의를 진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폭풍이나 폭우로, 지진이나 쓰나미로, 또는 군사 정권의 쿠데타나 전쟁으로 일상의교란을 겪은 적은 있지만,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이런 참상을겪은 일은 없었습니다. 언젠가 이 사태가 지나가겠지만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는데 익숙한 전문 관료들과 정치가들뿐만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혼란과 당혹감을 겪고 있습니다.

2. 이번 사태는 무엇보다 - 앞에서 이미 두 차례 언급했듯이 - ‘일상의 교란’을 가져왔습니다. 일상의 삶은 모든 것을 거의 당연시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때가 되면 직장에 가고 시장에 들릅니다. 붐비는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고 옆에 있는 사람들의 숨결을 느낍니다. 때로는 외국으로 나가 관광지를 찾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먹고 싶은 음식을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일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별로 하지 않았던 손 씻기를 틈날 때마다 열심히 하고 어디를 가든지 마스크를 쓰고 다닙니다. 처음에는 번역투의 말로 들리던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도 이제는 토속어처럼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악수하기 위해 당연히 손을 내밀었다가 서로가 멈칫하며 다시 거두는 일이 반복됩니다.그토록 익숙하던 일은 멈추고, 지금까지는 하지 않던 동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의식하지못하고 살아오던 일상은 우리를 품어 안아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해 온 장소요 시간이었음을 이런 방식의 교란을 통해 다시 의식하게되었습니다.

3.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서로 이어진 존재인지, 얼마나 가까이 살아왔는지, 얼마나 바쁘게 일해 왔는지, 얼마나 자주 집 바깥으로 나돌았는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출현은 일거에, 예고도 없이, 갑자기 우리에게 찾아와서 알려주었습니다. 사람은 모이고 어울리는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과 멀찍이 거리를 두고 살아가기보다는 서로 부대끼고 엉기고 치대고 심지어는 치근거리며 사는 무리입니다. COVID-19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이런 인간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이 점을 정확하게 공격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어져 있는 관계를 떨어지게 만들고 모임을 해체시키고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간의 호흡기를 파괴시켜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가장 좋은 장소는 사람들이 가까이, 친밀하게 모이는 곳입니다. 이 점에서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그리스도인이 바이러스가 침투하기 가장 좋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모이는 사람들이 있는 한 바이러스는 생존 환경을 확보합니다. 그러므로 바이러스에게 생존과 확산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면 흩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균이 몸에 침입하면 당연히 검사를 받고, 확진자로 판정되면 스스로 격리시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자가 격리를 하거나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서 바이러스 확산을 막아야 할 책임이 모이기를 좋아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습니다. 물론 이는 영구적 행위가 아니라 다시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공부하고 교제를 나누기 위한 일시적 행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함께 삶을 나누는 이웃 시민들의 안전과 건강을 생각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공동선의 추구일 뿐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주일예배 중지 불가론’은 여기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둘째,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몸으로는 서로 떨어져 있으나 마음으로는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결코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홀로 있어야 할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함께 있기를 추구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전화나 카카오톡, 스카이프(Skype)나 줌(Zoom)을 통하여 서로 돌아보고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 서로 이어져 있을 때 혼자 머물거나 홀로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때 더욱 형제자매가, 같은 공간 안에서, 몸으로 함께 주 앞에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오늘의 세계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로 엮여진 세계입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워낙 다양하고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지역과 계층과 성과 종교에 따른 자기 이익 추구가 삶의 많은 영역을 지배합니다. 오늘처럼수만 명이 죽어가는 사태가 벌어져도 지도력을 발휘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큰 나라는 큰나라대로, 작은 나라는 작은 나라대로 자국이익주의와 자국보호의 늪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오히려 한국과 같은 작은 나라가 중국의 우한과 북경 지역에 의료장비와 마스크를보냈습니다. 지금은 온 세계가 장막을 거두고 정보를 교환하고 인력과 장비를 보내어 서로 서로 도와야 할 때입니다. 더구나 인력도장비도 약품도 없는 나라들을 강하고 잘 사는 나라들이 지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귀한 인간이 바이러스의 침입앞에 죽어갈 수가 없습니다. 나라 간의 연대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일에 앞장 서야 할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인입니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며 북한이나 중국,유럽이나 아프리카가 모두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땅과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상을 보는 관점을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글의 초두에서 저는 ‘일상의 교란’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당연한 일상이 지금은 다르게 돌아갑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 동안의 삶이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실감합니다. 다리를 한번 다쳐보면 다리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습니다. 더구나 목발에 의지해서 계단을 오르내리게 되면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생활하시기에 얼마나 불편한 세상인지 체험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번 사태로 우리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며 함께 지내는 가족과 동료, 함께 사는 이웃과 동포, 함께 이 땅을 걸어가는 세계 시민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숨이 끊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일시적이며 허망한지,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그 분의 다스림이 얼마나 감사한지, 죽음이 다가오지만 죽음이 우리에게 궁극이 아님을 아는 것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기가 속히 지나가기를 간절히 빕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찬송하며 기도하는 시간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평안하십시오.




강영안

미국 칼빈신학대학원 교수(철학 신학)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 칸트 연구소 철학박사최근 저서 『믿는다는 것』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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